1974년 10월 30일 개막된 토리노 국제 자동차 박람회에 현대자동차가
‘포니’ 시제품을 출품했다. 세계 16번째,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한국이 고유모델 승용차를 갖게 됐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이듬해 11월
울산에 양산체계가 완성되고 드디어 1976년 2월 첫 양산차가 출고됐다.
우리나라 모든 언론들은 신생마 ‘포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매번 톱기사로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포니’를 화두로 삼았고 모든 국민의
가슴엔 ‘과학입국’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우수한 인재들이 자동차업계로
몰려들었으며 청소년들 사이에 이공계 열풍이 불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5대 자동차 수출국의 반열에 서 있다.
‘포니’ 탄생 후 4반세기가 흐른 지난 8월 20일, 공군 ○○비행단 활주로에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초음속 비행기 ‘T-50’이 첫 비행에 성공했다.
초음속 비행기는 일반 아음속비행기와는 차원이 다른 고도기술의 집약체다.
‘T-50’의 비행 성공은 우리나라가 세계 12번째 고유모델 초음속 항공기
생산국이 됐음을 내외에 공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국내
주요 언론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정치인 어느 누구도 ‘T-50’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이 ‘T-50’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평범한 기업체 연구원 다나카씨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일본이 환호하던 날,
나는 일본 출장에서 돌아왔다. 서울로 오는 공항버스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리처드 리스라는 외국인은 비행기 얘기를 꺼내자 대뜸 “한국 최초의
초음속기 비행 성공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국가들이 ‘T-50’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나는 민망하고 우울해져서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최고속도가 마하 1.4로 시속 1700 Km에 이르는 ‘T-50’은 날아다니는 최첨단
전자장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T-50’은 공대 졸업 후 23년간 경남 사천
오지에서 본인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고 오로지 국산 항공기 개발에 젊음을
바친 KAI의 박노선 공장장 같은 ‘이과’ 출신 ‘엔지니어’들이 일궈낸 꿈과
땀의 결실이다. ‘T-50’의 성공에는 또한 ‘죽음의 서약’을 하고 시험 비행에
목숨을 건 조광제 공군 중령 같은 ‘이과 군인 테스트 파일럿’들의 애국심도
녹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언론의 관심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의 귀감은 더 더욱 되지 못한다. 신문과 방송들은 연일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의 화려한 생활을 전하는 데 바쁘고, 많은 젊은이들은 6000만원이
넘는 렉서스를 ‘국민차’로 여기는 서울 강남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삶을
열망할 뿐이다.
항공기 수입이 우리나라 무역역조의 1등 공신이며, 미국이 최고의 항공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미국은 물론 일본·독일·영국·프랑스 등이 이미 20세기 초에 항공기술을
바탕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다. 본격적인 항공산업 진출로 기술선진국 대열에
끼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미국이 쓰다 버린 전투기나 개량해서 사용하는
기술 속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공산업은 자동차산업과는 또 다르다. 첨단전자·컴퓨터·통신·신소재
·기계·화공 등 거의 과학기술 분야의 통합시스템 사업인 동시에 국가 방위와
직결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투자단위가 커 이른바 ‘규모의 경제 (economy of
scale)’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점도 다른 산업과 차별화되는 요소다.
따라서 정부는 ‘꿈은 하늘에서도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고 적극적인
예산지원과 정책적인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언론도 이 땅의 많은 ‘이과’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열정이 헛되지 않도록 과학기술의 세계와 엔지니어들의
삶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T-50’은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포니’가 되어 창공을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2002/11/09 07: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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